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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걸 가르쳐서 미안합니다(만) ……
총관리자
2025-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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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랑비에 옷 젖는다고 이런 사건들이 한 번 두 번 일어날 때마다 세상이 완전히는 아닐지라도 조금씩은 변하는 거란 믿음 정도는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가랑비에 옷 젖는다고 이런 사건들이 한 번 두 번 일어날 때마다
세상이 완전히는 아닐지라도 조금씩은 변하는 거란 믿음 정도는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조선대학교에 전임교원으로 부임한 것은 2006년이었다.
서른아홉, 그때만 해도 아직 젊었고 세상 물정을 모르던 터라 인문학 전공하는 많은 연구자들이 흔히 빠지곤 하는 ‘인문학 제일주의’에 대해 진지하게 반성하지는 못했던 듯하다.
가령 ‘사람이 밥으로만 사는 거 아니다.
사람다운 삶이 뭔지를 먼저 생각해야지!’ 같은 완고한 믿음 말이다.
대단한 임무라도 수행하듯 그렇게 떠들고 다녔고, ‘라떼 세대’란 소릴 들어도 할 말은 없지만 지금도 그 믿음에는 변함이 없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점점 나는 강의실에서 떳떳하게 목청 높여 그렇게 말하지는 못하게 되었다.
세상은 갈수록, ‘사람다운 삶’을 생각할 여유도 필요도 없는 방식으로 돌아갔고, 그러는 와중에 인문학이나 문학은 그저 스펙, 취미, 여가, 마일리지 쌓기 정도로 취급당하기 일쑤였다.
그래서 이즈음에는 신학기 오리엔테이션 시간에 종종 “취업에도 스펙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 이런 수업을 해서 미안합니다”란 말로 한 학기 강의를 시작하곤 한다.
진심이었다.
말하자면 나는 반문학적이고 반인문학적인 시절에 주눅 들어 살았던 셈이다.
그런 상황이 일변한 것이 바로 작년 10월이었다.
멀리 스웨덴에서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이 날아들었다.
대한민국이 난리가 났다.
덕분에 그간 한강 문학에 각별한 관심을 보였던 나 역시 일평생 가장 바쁜 두 달을 보냈다.
인터뷰, 기사, 강연 요청이 쇄도했고, 인문학 부흥을 위한 광주시 차원의 자문위원회가 발족되었고, 그 위원장 일을 맡아 지금도 수행 중이다.
그 사이 ‘장안의 지가가 오른다’란 고사가 현실이 되어 한강의 책들은 없어서 못 구할 만큼 팔려나갔고, 웬만한 잡지나 언론에서는 작가 한강의 문학 세계에 대해 한두 마디쯤 거론하지 않은 경우를 찾기 힘들었다.
물론 그사이 시민들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친위 쿠데타 시도가 있었고, 그래서 한강 작가의 수상을 축하하는 범국민적 흐름에 찬물을 끼얹기도 했지만, 그래도 나는 기뻤다.
특히나 젊은 시위 참가자들이 응원봉과 『소년이 온다』를 들고 구호를 외치는 장면을 볼 때는 감동에 몸을 떨기도 했는데, 그럴 때 내 마음이 이랬다.
“이것이 여전한 문학의 힘인가!”혹은 “이것 좀 보세요. 이래서 인문학이 중요한 겁니다”. 요약하면 “으메 기살아!”쯤 되겠다.
그렇다, 그래서 문학이 중요하고 인문학이 중요하다.
프랑스 대혁명 이후 근대적 국가의 가장 중요한 전제가 된 ‘자유·평 등·박애’의 이념은 18세기 인문주의자들의 노력 없이는 정초 될 수 없었다.
민주적인 국가의 틀을 만들고, 작동 원리를 탐구하고, 끊임없는 비판으로 각종의 차별과 부정을 바로 잡는 것도 인문학의 힘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인문학과 관련된 독서나 생각을 하건 하지 않건, 우리 삶의 대부분은 인문학에 빚지고 있다.
몽상적이지만 종종 이런 생각도 한다.
“도대체 윤석열은 왜 저런 짓을 저지른 걸까?” 정신분석학적으로는 “편집증자라서 그렇다”라고 대답할 수 있겠다.
역사학적으로는 “한국 현대사 의 오랜 질곡이 낳은 괴물”이라고 대답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문학 하는 내 입장에서는 “그가 한강을 읽지 않아서”라고 답하는 것도 그리 이상한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이때 ‘한강’은 고유명사라기보다는 ‘좋은 문학’ 일반을 지칭한다.
좋은 문학과 오래 벗한 사람은 그렇게 행동하지 않고 또 그렇게 행동할 수도 없다.
문학은 타인의 삶을 들여다 보고 타인의 눈으로 또한 나를 들여다보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윤석열이 저 모양이 된 것은 “그가 책을 읽지 않아서” 라고 말한다 해서 큰 오류는 없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오늘 새벽 그의 구속영장 발부 소식을 듣고 법원에서 난동을 부린 시위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망상이란 “자기 비판에서 면제된 사유”를 일컫는다.
그리고 자기비판이야말로 인문학이 우리에게 항상 강조하는 사유의 겸손이다.
말하자면 그들도 책을 읽지 않아서 그리되었다.
종종 설문조사라도 해봤으면 좋겠다.
“(인)문학적 독서가 시민의식의 수준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통계 조사” 같은…….
물론 나도 완전한 바보는 아니다.
그러니까 한 번의 사건이 세계 전체를 바꿔 놓을 수 있다는 낙관 같은 것에 기대를 걸 만큼 젊지도 무모하지도 않다는 말이다.
사석에선 앞으로 2년 내 중고 시장에 가장 많이 나올 책은 한강의 책들일 것이라고 말하고 다니기도 하는데, 시도해 본 사람은 알겠지만 한강을 읽는 일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한강은 고통을 전하는 작가지 섣부른 낙관과 화해를 전하는 작가는 아니다.
태반이 읽다가 후회하거나 중단할 줄 나도 안다.
갑작스러운 문학 붐도 곧 식을 것이고, 수능식 문학 교육은 여전히 지속될 것이고, 나는 다시 새 학기마다 “이런 걸 가르쳐서 미안합니다” 라며 강의를 시작하게 될 줄도 안다.
그러나 나는 또 얼마간은 여전히 바보이고 무모하기도 한데, 가랑비에 옷 젖는다고 이런 사건들이 한 번 두 번 일어날 때마다 세상이 완전히는 아닐지라도 조금씩은 변하는 거란 믿음 정도는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한강은 ‘빛과 실’이란 제목의 수상소감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사랑이란 연결하는 고통이다”, 그리고 “언어는 연결하는 실이다”.
그에게 사랑은 고통이다.
왜냐하면 타인의 고통과 연결되려는 노력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연결은 ‘언어’ 없이 이루어질 수 없다.
그래서 언어는 실이다.
나는 그 언어를 가르치는 사람, 이제 한 차례 기쁜 소동을 겪었으니 다시 자리로 돌아가, “이런 걸 가르쳐서 미안 합니다‘만’……”으로 시작하는 쓸모없고 꼰대 같은 이야기들을 줄창 늘어놓을 작정이다.